토마스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토마스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미국의 발병가이자 특허수가 1,000종이 넘을 정도로 발명을 한 것이 많았으며 백열전구를 개발해 발전시키고 생산법을 발명을 했었다고 합니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실험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열전자 현상으로 연구가 되어서 진공관에 응용되어 전자공업의 발달에 바탕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에디슨의 일대기

 

1847년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태어나 발명왕이라고 불리울만큼 많은 발명을 한 에디슨.

제재소를 경영하던 아버지로 부터 막내로 태어나서 미시간주로 이사를 해 초등학교를 갔으마 산만한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집에서 에디슨을 가르쳤다고 하는데요.

가난한 집안으로 어렸을때 부터 신문과 과자 등을 철도에서 팔았으며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화물차 안에서 실험실을 만들어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기차 실험실에서 화재를 일으켜서 차장에게 맞아 귀에 청각장애가 생기기도 하였으며 계속되는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15세때에는 역장집 아이를 구하면서 전신술을 배웠으며 1869년까지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 전신수로 일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 무렵에 보스턴에서 패러데이의 ‘전기학의 실험적 연구’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책은 설명이 복잡하지 않고 어려운 수식을 쓰지 않은 것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고 하며 이 책에 나온 것을 보고 실험을 해서 전기투표기록기를 처음 만들어서 특허등록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해에는 주식상장표시기 등을 발명했다고 하며 이 발명으로 해서 번 돈을 가지고 뉴저지 뉴어크에 공장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후로 많은 곳으로 연구소를 옮기며 연구를 했는데요. 인자전신기, 이중전신기, 탄소전화기, 축음기, 백열전구, 영화 촬영기, 영화 영사기, 자기전광법, 축전기 등을 발명을 했다고 합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서 미국이 참전을 하게 되는데요. 이 때에는 사업을 중단하고 해군 고문회의의 회장직을 맡아 군사과학상의 문제에 몰두하였으며 종전 후에는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일생에서 가장 창조력이 뛰어났던 시기는 1876~1881년까지인데요. 당시에는 발명 때문에 기업이 번영하였으며 재벌들은 에디슨의 특허를 손에 경쟁까지 벌였다고 하네요. 이 때에는 전신, 전화, 백열등의 개량 등 많은 발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회사는 전구의 특허권을 둘러싼 소송으로 인해서 경제적 손실을 많이 봤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많은 손실로 인해서 회사에서 물러나게되며 전구를 발명하였지만 이익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에디슨은 대학의 강의를 경멸했다고 하는데요. 대학의 교육은 독창적이지 않고 하나의 틀에 맞춰서 교육을 하는 것이라며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에디슨이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요. 이것은 ‘천재란 99%가 땀이며 1% 영감이다’라는 말인데요. 자신은 발명을 하기 위해서 돈을 얻기 위해서 언제나 발명을 한다라고도 말을 했죠.

그 후 1931년 병으로 에디슨은 사망했다고 합니다. 밀란의 생가는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연구소는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