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오늘은 모차르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고집이 세고 어린 나이에 천재성이 강조된 탓에 성격이 괴팍했다고 전해지는데요. 순진한 친구를 불러다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악보를 바닥에 뿌리고 기어다니면서 주으라고 했으며 사촌여동생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적도 있다고 하네요.

모차르트는 카톨릭 세력이 강한 로마풍의 잘츠부르크에서 내어났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바이올리스트였으며 누나와 동생에게 음악교육을 시켰으며 모차르트는 비이상적인 음악적 재능이 보여서 주위를 놀라게 했을 정도라고 하는데요.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와 누나 나네를 데리고 뭰헨으로 연주 여행을 시도 하였으며 10년동안 연주 여행을 했다고 합니다. 1763년부터는 파리와 런던, 암스테르담으로 3년동안 여행을 했다고 하는데요. 연주회는 호평을 받았으며 신동으로 불릴만한 일들은 수없이 많이 남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몸이 허약했으며 정말 어려운 여행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청년기에 들어서는 정신적인 성장기와 맞물려 음악관의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요. 알렐루야를 포함한 엑슐타테 유빌라테는 여행의 산물이었다고 합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빈의 궁정악단에 취직을 시키려다 실패하고 고향의 궁정 음악가로 활동을 했다고 하는데요. 7년간의 활약을 하였으며 잘츠부르크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이 시기는 음악가로 개성을 단련하는 시기로 하이든 형제의 작품이 자극이 되었으며 빈 고전파의 사람으로서의 소지가 만들어져 갔다고 하네요. 21세부터는 어머니와 만하임, 파리로 여행을 떠났으며 만하임의 관현악단으로부터 큰 수확을 얻었다고 하네요.

이곳에서 모차르트는 베버가의 알로이지아에게 연심을 품었으며 어머니의 죽음과 알로이지아의 구애 실패로 커다란 고뇌를 주는 시기였다고 합니다. 25세가 되는 해에 대사교와 충돌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를 떠날 결심을 하고 빈으로 가게되는데요. 이 시기에 바이올린 협주곡 제5번, 교향곡 제31번, G장조와 D장조의 플루트 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대관식미사 등을 들 수 있다고 합니다.

빈에서는 1781년 이후에 명작등을 많이 만들었는데요. 1782년 오페라 후궁으로 부터의 도주가 완성되었으며 알로이지아의 동생인 콘스탄체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피아노 협주곡 d단조, 피가로의 결혼을 완성하였으며 프라하를 방문해 시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고 하네요.

그러나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그리 풍족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아내인 콘스탄체는 살림을 잘 꾸리는 능력은 없었으며 이미 장남을 잃은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겼으며 중병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나온 것이 현악 5중주곡 g단조가 나왔습니다. 세속적인 성공과는 반대인, 습하고 암울한 생활 속에 최후의 4년간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모차르트 32세 창작활동은 꾸준하게 계속되었는데요. 6월부터의 기적이 2개월간의 고전 교향곡의 극치를 보여주는 마지막 3대 교향곡이 완성되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을 빈의 청중들은 이해를 못했으며 연봉 또한 적은 액수라고 하는데요. 돈을 마련하기 위한 여행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1791년에는 오페라 마적의 완성을 앞둔 모차르트에게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를 했는데요. 그러나 당시 모차르트는 요독증으로 머리가 혼란했으며 죽음이 가까웠음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마적은 완성을 하였으나 레퀴엠은 미완성된채 35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죽은 후에도 장례식에 참석자가 적었으며 아직까지 묻힌 장소도 불분명하다고 하는데요. 위에도 말한 것 처럼 위인다움이나 영웅적인 이야기는 적으며 천재이긴 하지만 일반 시민적인 생활을 했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