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 (Mohandas Karamchand Gandhi)

간디에 대해서도 많이 아실 텐데요. 간디 평화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지만 문란함의 상징이라고 불릴 만큼 충격적인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간디에 대한 추문들이 많아서 일듯 한데요. 간디는 금욕생활의 실천이라고 하며 부인과의 성관계 및 자위행위를 30대에 끊었으며 중년 이후에는 맹세가 깨지자 속죄를 한다며 여러 여성들과 동침을 하거나 10대 소녀나 추종자의 아내들과 알몸으로 체온을 나눈다거나 알몸 마사지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행위 외에는 다른 행위가 없었으므로 금욕 상태라고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스트제도를 옹호하며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자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하는데요. 이로 인해서 2016년에는 가나의 간디 동상을 철거 요구도 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아는 간디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인도의 서부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간디의 집안은 상인계급에 속하였으며 식료품을 팔았다고 전해지는데요. 할아버지는 어탐 찬드 간디로 포르반다르에서 관리로 근무했다고 하네요. 할아버지는 자식이 아들 6명을 두고 있었으며 5번째 아들 마하트마 간디가 간디의 아버지라고 하는데요.

간디는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서 13세에 동갑인 카스토르 바이와 결혼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결혼을 형과 삼촌이 함께 하는 합동결혼식이었다고 하는데요. 16세에 아이를 낳았으나 4일 만에 죽었으며 아버지도 그 해에 치라 염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자서전에는 어린 시절의 결혼생활의 죄책감을 느끼며 인도의 조혼 풍습에 대해서 강도 높게 비판하는 글이 있다고 합니다.

1887년인 18세가 되면서 아메드 바드 대학 시험에 합격 학비가 싼 사말 다스 대학에 입을 하였지만 내용이 어려워서 한 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법률 공부를 하고 오면 좋은 일자리와 수익이 보장된다는 말을 듣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데요.

런던에서의 생활은 채식 습관으로 인해서 고생을 하였으며 법 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변호사 면허를 취득하고 나서 고등법원에 등록을 하였으며 인도로 다시 가게 됩니다. 자서전에는 영국의 변호사 자격을 따는 것은 쉬웠으며 시험조차 가치가 없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았다고 하네요. 그리고 법정에 어떻게 서며 어떻게 먹고살지 의심과 걱정을 정말 많이 했었다고 합니다.

인도로 와서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지만 역시나 실패를 하였으며 1893년에는 소송사건을 의뢰받아서 1년간의 계약으로 남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가게 됩니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인도 사람이 약 7만 명 정도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차별 대우를 받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인도 사람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찾기 위해서 인종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조직해 1914년까지 지도자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힘 사라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을 중심으로 해서 간디주의를 형성하였다고 하는데요. 인종차별에 대한 압박에 투쟁을 하고 자기실현을 위한 도야와 수양의 노력은 훗날 간디가 인도에서 독립운동의 모형이 되었으며 아슈라 마를 중심으로 한 정신개조 개혁의 토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8년 동안 인두세를 비롯해서 차별 법에 반대를 하였고 1913년 44세가 되던 때에 나탈주에서 사피아 그라하 행진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이 되었습니다. 당시 참가자는 4,000명은 체포가 되었으며 세계적으로 여론의 동정을 받아 당국을 굴복시켰다고 하는데요. 결국 인도인에 대한 차별 법은 모두 폐지가 되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간디가 되었다고 합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인도의 독립을 위해서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다고 하는데요. 전쟁 후에는 영국이 배신을 하였으며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인도를 다니면서 수방 운동을 장려했다고 하는데요. 납세 거부, 취업 거부, 상품 불매, 비폭력 저항을 실시했다고 합니다. 불매운동에는 성공하였으나 인도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문으로 운동이 잠시 중단되었다고 하네요.

간디는 투옥되었으며 풀려나서 부상 운동으로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고 하는데요. 1929년에는 연차대회에서 국민회의 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61세에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소금세 신설 반대 운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다시 투옥되었으며 또다시 석방 후에는 어윈 총독과 절충 후에 불복종운동을 중지하였으며 그럼에도 다시 시작된 영국의 탑 안정책으로 불복종운동을 재개해서 다시 투옥이 되고 1932년에 석방이 되었다고 하네요.

2차 세계대전이 일아나고 인도를 전쟁에 투입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해서 인도의 완전 독립을 약속받으려고 했으나 역시 타결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시 영국 세력에 대항해서 반영 불복종운동에 돌입하게 되는데요. 다시 체포가 되어서 감옥에 갔다 오게 됩니다. 나와서는 인도를 하나의 감옥으로 보고 다시 인도의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 여러 곳을 다녔다고 하는데요.

간디는 이처럼 당시 무력으로 인한 독립이 많았던 시기에 비폭력으로 평화적으로 독립을 외쳤던 것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렇게 그 평화사상과 함께 평화에 바친 업적으로는 실천 면에서 민주적 민족주의자로 보는 것이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간디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것을 주변에 보였으며 문란한 생활도 했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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